[카드1]2025년 단체교섭 기록-03.2025년 단체협약 체결, 무엇이 남았는가
2025년 단체협약 체결, 무엇이 남았는가
2026년 1월 21일, 중울산농협의 새 단체협약이 시행됐습니다.
총 8장 본문에 별표 셋, 별첨 둘. 9개월에 걸친 본교섭 7회, 실무교섭 11회, 그리고 그사이 두 차례의 잠정합의를 거쳐 이르른 자리였습니다. 노사가 한 자리에 앉아 단체협약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매듭을 지은 것은 2010년 이래 처음입니다. 15년의 공백 끝의 다시 매듭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 매듭이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하는 글입니다.
체결되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체결이 무엇을 새로 만들었고 무엇을 남기지 못했는가에 무게를 두려 합니다. 그 둘은 같은 무게로 다뤄져야 합니다. 매듭은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5월 12일에서 1월 21일까지
9개월 전, 5월 12일 화요일 오후. 1차 본교섭이 열렸을 때 조합장이 인사로 자리를 열며 한 말이 있습니다.
“참 오랜만에 합니다. 저도 조합장이 되고 처음 노사 교섭을 하다 보니까 또 기대도 되고 또 한편 훈련도 많이 됩니다.”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 15년의 공백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본조 조직실장이 양측 교섭위원을 한 사람씩 호명하며 인사를 시키고, 위원장과 본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던 그 풍경은, 사실 협약이 시작된 자리라기보다 협약이라는 자리 자체가 다시 만들어진 자리였습니다.
15년 동안 중울산농협에는 노사협의회가 있었지만, 단체협약은 사실상 없었습니다. 노조의 안건은 상정조차 되지 않은 채 사전검열을 거치는 일이 반복됐고, 노사협의회가 어떤 결정의 자리이기보다 형식의 자리에 가까웠습니다. 그 시기의 노조는 회의에 들어갈 수는 있지만 의제를 만들 수는 없었고, 발언할 수는 있지만 결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5월 12일의 자리는 그 구도 자체가 다시 짜이는 자리였고, 1월 21일은 그 새 구도가 협약이라는 형태로 매듭지어지는 자리였습니다. 9개월 사이에 만들어진 것은 개별 조항만이 아니라 노사가 한 자리에 앉아 합의로 무언가를 정해 본다는 경험 그 자체였습니다.
이 경험이 이번 단체협약이 남긴 가장 첫 번째이자 어쩌면 가장 큰 자산일지 모릅니다.
사규의 자리에서 협약의 자리로
단체협약 체결 이전, 중울산농협에서 노동조건을 정하는 일은 대체로 사규로 이루어졌습니다. 직원급여규정, 직제규정, 직원 퇴직급여 및 재해보상 규정, 계약직직원운용규정 ─ 이런 규정들이 임금·인사·퇴직·복리후생의 기준을 정해 왔습니다.
사규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빠르고, 한 방향입니다. 사용자가 만들고, 사용자가 고치고, 변경 시 의견 청취는 있되 합의는 없습니다. 노동조합의 자리는 그 절차의 바깥에 있습니다.
단체협약은 그 구도를 바꿉니다. 협약 본문 제2조는 그 변화를 한 줄로 적습니다.
이 협약에 정한 기준은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 취업규칙과 제규정, 개별적 근로계약, 노동관행에 우선적용하며, 그 중 협약의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 그 부분을 무효로 하고 이 협약 기준에 따른다.
이 한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이제 사규는 단체협약과 충돌할 수 없습니다. 충돌하면 무효가 됩니다. 사규의 일방성이, 협약의 합의성에 자리를 내준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이번 단체협약 체결로 노동조건을 정하는 자리가 한 자리에서 두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자리 중 더 우위에 있는 자리가 합의의 자리입니다.
조합원에게 이 변화는 이렇게 닿습니다. 어떤 노동조건을 두고 해석이 달라질 때, 어떤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느낄 때, 이제는 “그때그때의 설명”이 아니라 “노사가 함께 체결한 협약”을 기준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지회가 조합원을 대표해 무언가를 요구할 때, 그 요구의 근거가 한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한 권의 문서 안에 적혀 있다는 것. 그게 사규에서 협약으로 자리가 옮겨졌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의 메신저가 협약의 절차로
이 단체협약을 이번에 매듭짓고 싶었던 가장 깊은 이유를 가장 분명하게 적은 자리는 협약 본문이 아닙니다. 8월 30일, 6차 실무교섭이 끝나고 며칠이 지난 무렵, 지회장이 그 시기에 혼자 정리해 둔 글 안에 있습니다. 같은 시기, 노사 교섭이 가장 거칠게 흔들리던 무렵에 적은 글입니다.
“나는 단협을 통해 절차적 투명성을 확보하고, 정보의 공개를 요구하고 싶어. 그리고 노사 대화 연결의 고리를 형성하고 싶고.”
“나는 지회장으로써 여러분들의 생각을 전달하는 메신저가 되겠다. 현재 직원들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 의견 등을 정리해서 잘 전달을 하겠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이자 행동이라고도 했어.”
“하지만 나에겐 권한이 없고, 법적인 힘도 부여되지 않았어. 그래서 단협을 통해 이를 부여 받고, 작지만 꼭 필요한 행동들을 하고 싶어. 인사를 결정하고 관여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 과정을 투명하게 지켜보고 싶고, 내용을 조합원들에게 알리고 싶어. 회의록 작성을 단협에 명시하고 싶어.”
지회장 한 사람이 짊어지던 메신저 역할에 법적 자리를 만드는 일 ─ 이것이 협약을 통해 도달하고 싶었던 자리였습니다.
이 결심이 협약 본문 안에 어떻게 자리잡았는지를 짚어보면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제3조(협약의 준수의무)의 마지막 한 줄에는 “필요한 경우 협약에 의하여 발생하는 상황을 기록, 작성한다”가 들어갔습니다. 제12조(조합원 교육시간)는 반기별 2시간의 유급 조합원 교육시간을 명시하고, 신입직원 교육 시 노동조합 소개시간 제공도 같이 적었습니다. 제17조(통지의무)는 명칭 변경, 채용·승진·이동·퇴직 기준 변경, 조직·직제 개편, 노동조건 변경 등 중요 사항을 노사가 서로에게 문서로 통지하도록 정했습니다. 제151조(교섭회의)는 노사 양측이 회의 종료 시 회의록을 채택하고 한 부씩 보관하도록 정했고, 협의를 통해 녹취도 가능하도록 정했습니다. 인사위원회(제36조)는 9인 중 지회장과 지회장이 지명하는 1인이 함께 들어가게 해, 인사의 자리에 노조의 자리가 두 칸 만들어졌습니다.
이 조항들을 한 줄로 묶으면 이렇게 됩니다 ─ 한 사람이 입으로 짊어지던 일이 협약의 절차로 자리잡았다. 메신저로서의 역할이 한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노사가 함께 정한 약속의 자리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다음 지회장이 와도, 그 다음 지회장이 와도, 이 절차들은 남아 있습니다.
이 변화가 두 번째 의미입니다.
합의의 두께 ─ 일상에 닿는 약속들
단체협약은 절차의 글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조합원의 일상에 직접 닿는 항목들도 함께 매듭지어졌습니다.
노동시간과 휴식. 주 40시간, 토요일 유급휴무, 4시간 근무 시 30분·8시간 이상 1시간의 자유로운 휴게시간(제63조). 노동시간의 정의에 직원회의·교육·연수·청소·작업 준비까지 포함된다는 점이 명시됐습니다(제63조 ③항).
휴가의 갈래들. 연차휴가·인정휴가·청원휴가·명령휴가의 네 갈래(제65조)에 더해, 각 휴가의 사용 기준이 별표로 따로 정리됐습니다. 별표 1·2·3은 인정휴가·재해부조금·경조금의 세부 기준을 담은 자리로, 협약 본문과 함께 효력을 가집니다.
고용 보장의 절차. 분할·합병·양도·분사·아웃소싱 추진 시 90일 전 통보와 충분한 협의, 해산·이전·업종전환 시 3개월 전 통보, 경영상 이유의 해고는 60일 전 노동조합 통보 및 성실 협의. 일정 사유로 해고할 때 이사회 결의를 통한 퇴직위로금 지급도 함께 적었습니다.
복리후생. 조합비 등 일괄공제, 사회적 책무 조항(제24조 ─ 농·축산물 수입개방, 농가부채 등 농민현안 문제 해결 노력), 그리고 사내근로복지기금 관련 규정.
임금. 임금은 매년 임금교섭을 통해 결정하도록 정했고(제59조), 이번 단체협약과 별도로 임금협약(유효기간 1년)을 체결하기로 했습니다. 단체협약은 2년 4개월의 유효기간(2026.1.21 ~ 2028.5.31)으로 정해졌고, 그 안에서 임금만 매년 별도로 새로 정하는 구조입니다.
일터에서의 존중과 안전. 협약은 임금이나 시간만 다루는 문서가 아닙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성희롱·성폭력 예방과 대응, 고객으로부터의 폭언·폭행에 대한 보호, 모성보호와 안전보건 ─ 이런 항목들이 협약 안에 함께 들어왔습니다. 이런 일들이 도덕의 문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터의 공식 절차로 다뤄져야 한다는 기준이 협약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 항목들이 함께 묶여 협약 한 권을 이룹니다. 어느 한 항목이 별나게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다른 농협의 단체협약에도 비슷한 항목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다만 중울산농협에서는 이 항목들이 노사가 함께 정한 약속의 형태로 자리잡은 것은 처음입니다. 그게 두께입니다.
매듭지어지지 않은 것
체결의 의미를 정직하게 정리하려면 매듭지어지지 않은 것도 같이 적어야 합니다.
11월 19일 11차 실무교섭에서 노사가 정리한 자료에는 두 묶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합의·의견일치 조문, 다른 하나는 최종 미합의 조문. 미합의 조문은 잠정합의 직전까지도 끝까지 서로 다른 입장이 좁혀지지 않은 자리들이었습니다.
이 자리들의 구체적인 쟁점은 다음 글들에서 따로 다루겠습니다. 6번 조문별 상세 해설과 8번 미합의 쟁점과 과제가 그 자리입니다. 이 글에서는 사실 한 가지만 짚어 두려 합니다.
미합의로 남은 자리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단체협약의 결말입니다. 합의된 항목들이 협약 본문에 들어간 것과 같은 무게로, 합의되지 않은 항목들은 협약 바깥에 남아 있습니다. 이번 단체협약은 이번 단체협약이 다룰 수 있는 만큼을 다뤘고, 그 너머는 다음 협약, 보충협약, 노사 대화의 자리로 넘어갔습니다.
단체협약 본문 제8조는 그것을 한 줄로 적습니다.
사회적 경제적 여건의 변화와 법제도 변경 또는 협약에 누락되었거나, 협약의 내용 중 구체화 시킬 필요가 있거나, 수정·보충되어야 할 사항에 대하여는, 본 협약의 유효기간 중이라도 보충협약을 체결할 수 있다.
매듭지어지지 않은 것을 다음 자리로 보내는 절차가 협약 안에 들어가 있다는 뜻입니다. 끝났지만 다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협약 자체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아침이었습니다. 잠정합의안이 사실상 확정된 시점에 지회장이 그 무렵의 메모에 적은 한 줄이 있습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체결하진 않았지만 큰 수정 없이 이대로 합의가 될 것 같은데, 이번 잠정합의안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질문 안에 두 마음이 들어 있었습니다. 끝났다는 안도와, 끝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8월 26일 6차 실무교섭 직후 “그동안 우리가 했던 방법이 다 잘못 되었던 거 같아”라며 깊은 자성을 토로하던 자리에서 출발해, 이 메모 자리까지 오는 동안 마음의 진폭은 컸습니다.
한 달 뒤 1월 18일, 조인식을 사흘 앞두고 다시 적은 메모가 있습니다.
“이 자리는 어찌 되었든 좋은 말만 하고 서로 고생 많았다는 점만 얘기하는 게 좋겠지. 아쉬운 부분이나 사측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 준 게 없거나 미흡하더거나, 사실상 노조가 거의 다 양보했다 등의 말이나 뉘앙스 등은 전혀 풍기지 않는 게 좋겠지.”
이 한 줄에는 1년의 무게가 다 들어 있습니다. 양보가 적지 않았다는 인식, 그래도 매듭은 지었다는 자각, 그리고 매듭의 자리에서는 그 양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맞다는 판단까지.
체결은 그렇게, 흔들리면서,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단체협약은 체결로 끝나는 약속이 아닙니다. 한번 매듭지어졌다고 그 매듭이 알아서 풀어지지 않고 알아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노사 양쪽이 협약을 운용하고 이행해 가는 일상의 절차 속에서만 단체협약은 살아 있습니다.
회의록은 작성되어야 의미가 있고, 통지의무는 통지되어야 의미가 있고, 인사위원회의 노조 추천 위원은 회의에 들어가야 의미가 있고, 조합원 교육시간은 교육이 이루어져야 의미가 있습니다. 체결은 시작입니다. 운용이 본질입니다.
조합원이 알아야, 협약은 힘을 갖습니다
단체협약은 지회 집행부만의 문서가 아닙니다.
조합원이 모르면 협약은 책장 속 문서가 됩니다. 조합원이 읽고, 질문하고, 현장에서 확인할 때 협약은 비로소 힘을 갖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협약이 적용되는 걸까?
이런 통보를 받았을 때 지회에 알려야 할까?
휴가나 연장근로, 인사와 관련해 어떤 기준을 확인해야 할까?
직장 내 괴롭힘이나 고객 폭언을 겪었을 때 어떤 절차가 있을까?
이런 질문이 조합원으로부터 많아질수록 협약은 살아 있는 문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곧 지회의 일이 됩니다. 지회는 조합원의 그 질문에 협약 조문을 근거로 답하고, 농협이 협약을 성실히 이행하는지 함께 확인하고, 필요하면 보충협약과 다음 교섭의 자리에서 빈 자리를 채워가는 일을 합니다.
그 과정이 쌓일 때 단체협약은 종이 위의 문서가 아니라 조합원의 일상 속 권리가 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번 단체협약 체결의 의미를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노조가 입을 가지게 되었고, 그 입에 절차의 자리가 만들어졌으며, 그 자리에서 다시 다음 약속을 짓기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15년의 공백이 한 번에 메워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번 9개월의 매듭으로, 다음 매듭을 짓기 위한 출발점이 분명해졌습니다. 누가 이겼다는 선언도 아니고, 모든 요구가 풀렸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의 문서를 체결한 것이 아니라, 조합원이 함께 확인하고 지켜갈 기준을 세웠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협약의 조문 하나하나가 조합원의 일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풀어 드리겠습니다. 6번 조문별 상세 해설입니다. 협약의 우선 적용과 노동조건 저하 금지, 조합활동과 교육·자료제공, 인사·징계 절차, 노동시간과 휴일·휴가, 일터에서의 존중과 안전, 복지후생, 그리고 보충협약과 이행 절차의 순서로 함께 보겠습니다. 협약이라는 한 권의 문서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에 어떻게 닿아 있는지 ─ 그것을 천천히 짚어 가겠습니다.